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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김병현 선수의 연봉 결혼 재산 경력 사업 구설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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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김병현 선수의 연봉 결혼 재산 경력 사업 구설수 등

◎ 김병현 선수의 경력

김병현 선수는 1979년 2월 15일 생으로 광주수창초 - 무등중 - 광주일고를 나와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한 후 대학 선수 시절 미국 애라조나 다이아몬드백스(D-Backs)에 스카우트 되어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선수를 한 명 뽑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론 될 선수 입니다. 그는 한국 아마추어 선수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최고의 계약금을 가지고 있으며(225만 달러), 한국인 최초이자 동양인 최초로 양대리그에서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우승반지를 2개 소유한 선수입니다.

김병현은 유격수로 야구를 시작하였지만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투수로 전향하였습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천재이자,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며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하며 프로가 되기 전 병역 면제 혜택까지 이루어 냅니다. 병역에 대한 문제가 전혀 없던 그는 애리조나로 스카우트 되었으며 남들은 한번도 밟기 힘들다는 메이저리그 무대에 입성하게 됩니다.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언더핸드(언더스로) 투수이면서 최고 154km/h, 평균 140km 중반을 던졌으며 마구로 불릴만큼의 변화를 보여주는 구종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능력으로 1이닝 9구 3탈삼진의 기록을 보여주었으며, 어떤 선수와도 적극적인 승부를 벌이는 배짱과 어마어마한 탈삼진 능력으로 Born to K, 줄여서 BK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또한 밑에서 공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핵잠수함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김병현은 항상 선발을 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메이저리그에서 그는 계투 및 마무리의 불펜을 주 보직으로 받게 됩니다. 2001년 만 22세로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까지 등판한 그는 첫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정작 본인은 부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워낙 배짱이 좋은 선수지만 월드시리즈의 부담감을 이겨내기엔 너무 어린 나이와 선발투수도 아닌 불펜투수로서 100이닝이 넘는 혹사가 문제였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메이저리그에서 풀타임 마무리로 2.04의 방어율과 36세이브를 보여주었고, 선발로 전향한 후에도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경기 중 부러진 배트에 맞아 부상을 당하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바람에 점차 하락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2003년 트레이드로 팀을 보스턴 레드삭스로 옮긴 후에도 선발과 불펜을 오가지만 그 전 만큼의 임펙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2004년 밤비노의 저주를 이겨내고 또 하나의 우승반지를 얻게 됩니다. 

우승 반지는 얻었으나 2번째 우승에 기여도가 극히 낮았던 김병현은 불안한 입지로 인해 콜로라도 로키스 - 플로리다 말린스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 - 플로리다 말린스 로 계속해서 팀을 옮기게 되며 메이저리그 생활을 이어가지만 결국 마이너리그 팀인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 후 방출을 당해 2008년 야구를 그만두게 됩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던 김병현은 몸을 만들며 복귀를 준비했고 2010년 마이너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그만두었고, 일본으로 넘어가 도호쿠 라쿠덴 골드이글스에 입단하지만 또다시 방출의 쓴 아픔을 격습니다. 

2012년 넥센 히어로즈 소속으로 국내 프로무대에 온 김병현은 2014년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으나 맹장수술, 잔부상, 무너진 밸런스 등으로 임팩트있는 활약을 남기지 못하여 제대로된 은퇴식도 갖지 못한 채 보류선수가 되어 2017년 이후 야구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야구를 하고 싶었던 김병현은 도미니카 윈터리그, 호주 프로리그 등에 도전했지만 결국 2019년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습니다. 

이 후 야구 해설자로 변신한 그는 방송에 종종 얼굴을 비치고 있고, 최근 뭉쳐야찬다에도 특별출연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김병현 선수의 연봉

애리조나에서 정상급 마무리로 활동한 그는 2002년 약 76만 달러(약 8억5000만원), 2003년 325만 달러(약 36억3000만원), 2004년 애리조나와 2년간 1000만 달러(약 111억 8800만원)에 재계약했고, 콜로라도 시절이던 2005년 가장 많은 500만 달러(약 56억원)의 연봉을 수령하였습니다.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뛴 9년간 총 2500만 달러(약 207억원)라는 연봉을 받았습니다. 또한 넥센 히어로즈 시절 최대 6억원, 기아 타이거즈 시절 2억원을 받았습니다. 

 

◎ 김병현 선수의 구설수, 사건 사고

김병현은 선수시절 강한 승부욕과 자존심, 솔직한 성격 때문인지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애리조나 시절 감독의 고의 4구 사인에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경기에 내보내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이후 경기 출전 명령에 불복하기도 합니다.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에는 2003년 디비전시리즈에서 펜웨이 파크의 홈 팬들에게 손가락 욕설을 날리며 또 한번 구설수에 오릅니다. 이 사건으로 김병현을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이로 인해 김좆키, 김법규라는 말이 생겼고 한국 복귀후부터는 법규, 법규형님, 법규성님등의 별명이 부정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사실상 김병현의 애칭으로 고정되었습니다.

또한 기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던 그는 굿데이스포츠 기자의 앙심섞인 거짓 보도로 인해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습니다. 사전 협의 되지 않은 인터뷰에 대해 실랑이를 벌이던 중 기자의 카메라가 손상되었는데 이 사건을 김병현의 폭행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시간이 흐른 뒤 사실이 밝혀졌으며 사회적 역풍으로 인해 굿데이스포츠는 폐간까지 이르게 됩니다. 

◎ 김병현 선수의 우승반지

김병현 선수는 야구 외의 거의 모든 일에 무감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2개나 가지고 있는 그는 한국 팬들을 위해 월드 시리즈 반지 국내 기증 의사를 밝혔었습니다. 하지만 우승 반지를 어디에 둔지 몰라서 기증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팬들 사이에서는 '우승반지를 명분없이 가지려고 하는 KBO가 문제다.' '김병현이 주기 싫어서 거짓말을 한다' 등등 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훗날 김병현이 KBO에 연락을 하여 차 트렁크를 청소하다가 찾았다고 밝혀왔다고 합니다. 우승반지 하나를 얻기 위해 온갖 비난 속에 팀을 옮기는 선수들도 있는 것을 보면 김병현 선수의 성격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2019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김병현은 이렇게 어렵게 찾은 반지를 이사하는 도중 또 잃어버렸다고 밝혔습니다.

 

◎ 김병현의 사업

김병현은 야구선수로서의 실력만큼이나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미국에서 시작한 '우미스시' 초밥집은 현지에서 대박이 났으며,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겨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 해방촌에서도 '팟카파우'라는 태국 음식점도 운영 중입니다. 

자신의 고향인 광주에서는 전남대학교 부근에 라멘집을 운영하였고, 예술의 거리에 자신의 출신학교의 이름을 딴 '광주제일햄버고'라는 수제 햄버거집을 오픈하였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 김병현의 가족, 부인, 자녀

김병현의 아내는 한경민씨로 단국대 연극영화과 99학번 졸업생입니다. 주변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평범하면서도 밝은 성격에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해 주며 엉뚱한 면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단역배우와 식품회사 광고에도 출연했던 그녀는 김병현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야구선수라는 것도 모른체 연애를 시작하여 결혼까지 이르게 됐다고 합니다. 자녀는 셋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위에서도 언급했던 언론과 가깝게 지내지 않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에 대한 것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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